2009. 2. 8. 21:36
1. 만주어가 살아숨쉬는 곳


글: 이승섭(자유기고가)


찹찰 시버 자치현[찰포사이察布査爾 석백錫伯 자치현自治縣, Capcal Xibe-]은 과거 구 소련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신장위구르자치주의 한 현(縣)이었지만, 구 소련이 해체된 후 지금은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찹찰 시버족 자치현을 포함해서 신장위구르자치주에는 17만 여 명(1990년 조사)의 시버족이 살고 있다. 시버족은 한자로는 ‘錫伯’로 표기하며 로만알파벳으로는 Sibo, Sibe, Xibo, Xibe 등으로 표기한다.

이들의 언어인 시버어가 우리에게 특별히 남다른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최후의 ‘만주어’와 다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시버족은 본래 만주동북방에 웅거했던 선비(鮮卑) 또는 실위(室衛)족의 후손으로 17세기 중반까지 그들은 말갈(Merkit) / 여진(Jurchen) / 만주(Manchu) 민족들과 섞여 살면서 퉁구스화(Tungusicalization)하였고, 특히 청나라가 건립되면서, 그들은 거의 남만주 지방으로 내려와 만주 문자(소그디안문자>위구르문자>몽골비칙>만주문자)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1711~1799) 29년(1746), 시버족 역사의 최대 비극이자, 시버 민족사의 일대 전환이 되었던 사건이 일어났다.

청나라 조정은 서북 변경인 일리지역의 국경 방비를 위해, (만주족과 가까우면서도 만주족에게 비협조적이었던) 용맹한 민족인 시버족들로 하여금 이 지역에 가도록 결정한 것이다. 청나라 조정은 당시 성경(盛京:지금의 심양[瀋陽]) 일대에 있던 시버족 군인과 그 가족 3천2백75명을 뽑아, 고향에서 4천㎞ 이상 떨어진 신강성(新疆省)의 일리강 서쪽 찹찰 지역으로 강제 이동시켰던 것이다.

마치 스탈린에 의한 연해주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와 같은 이 비극적인 민족의 이동과 그후의 현지 정착 과정은, 현재 시버족들 사이에 슬픈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고, 많은 전설과 민요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시버족으로서는 눈물 없이는 말할 수 없는 이 사건이 언어학적, 민족학적으로는 커다란 의미를 주는 사건이 되었다.
사실 중국 각 처에 흩어져 있는 만주족들은 일부 후미진 지역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한족(漢族)화 하여 모국어인 만주말을 거의 잊어버렸고, 시버족 중에서 중국의 동북지방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만주족과 마찬가지로 그들 언어인 만주말을 잊어버렸지만, 서북쪽으로 이동된 시버족의 후손들은 현재까지 그들의 말과 글자(만주어, 만주문자)와 풍속을 보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내에서는 김동소(金東昭)교수가 이 지역을 수 차례 방문하여 연구발표한 바 있다.

시버어가 만주어의 문화적 유산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고맙기 그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한국어 연구에 있어서 현대한국어와 알타이 제언어들간의 핵심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은 만주어를 포함한 만주지방에서 사용되었던 남퉁구스(南Tungus)계통의 언어들이다.

러시아 연해주지방에 명맥이 남아 있는 나나이어(Nanai), 우디헤어(Udihe)보다는 압록강을 맞댄 만주지방에서 존재했던 만주어가 한국의 고대사를 바로 세우는데에 중요한 열쇠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실상 귀중한 연구자료인 살아 있는 만주어가 흑룡강, 요령, 길림의 동북 3성에서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사어(死語)가 된 것이다.
이런 안타까움 속에서 그나마 신장(新疆)의 변방지대에 보존되어 있는 시버어는 고대 한국어 연구의 중요한 보고(寶庫)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국사관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무관심은 바로 고구려는 민족의 뿌리로 인식하면서도 고구려 패망 이후의 고구려 강역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무관심했었다는 것이다. 당나라군이 많은 수의 고구려인들을 지금의 카자흐스탄 부근의 서역지방이나 또는 운남성 너머와 같은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는 해도 대다수의 고구려 백성들은, 반도의 동족들이 그들의 존재를 잊고 지내오는 동안, 나라 잃은 채로 만주벌판에서 계속 살아온 것이다.
그들은 여진, 숙신, 선비, 거란, 말갈 등의 이름으로 장성(長城)을 넘어 중국의 한족들을 지배하기도 했고, 몽골과 싸우기도 하고, 때론 압록강을 넘어오기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 식민사관에 호도당한 우리 국사교육은 만주언어에 대한 고찰은 물론이고 만주일대의 제 민족들인 여진, 숙신, 말갈족들에 대해서는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야만인들로 묘사하여 교육하는 씻을 수 없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자연히 고조선, 부여,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는 그 정확한 실체를 후손들에게 전해주기에는 불완전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늦게나마 한민족의 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접근노력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최근의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한국사회에 고구려에 대한 재인식과 일반인들의 역사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옛 고구려 강역은 현재 대한민국보다는 북한지역과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고, 이것은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정치적 계산이 깔린 중국의 역사조작기도 앞에서는 우리의 고구려사를 포함한 이전과 이후의 대륙역사 연구에 있어서 많은 물리적 장애가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유적발굴과 같은 방법과 병행하여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언어연구를 통한 접근방법이다.
만주지역의 소수민족 언어들과 몽골,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언어들에 대한 연구는 이웃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다.

지금은 사멸된 여진어(Jurchen)의 자료는 오히려 19세기 만주일대를 연구한 독일학자들에 의한 독일어 서적이 귀중한 자료가 되는 실정이다.

현재 동북지방의 만주어는 고작 20내지 70명의 사용자가 있을 뿐이라고 조사되었다(1995 M. Krauss).
그나마 대부분 노인들이어서, 적어도 흑룡강성, 요녕성, 길림성의 동북 3성에서는 이미 만주어는 이미 멸종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학계에서 판정할 정도이다.

그런 상황에서 1746년에 머나먼 서역지방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던 만주족의 일족인 시버인들이 생생히 살아 있는 언어로서 구어만주어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고대사 찾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보다 많은 이들이 만주어연구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처: 땅이야기(한국토지공사 웹진) 2004년 9월 10일]




2. 시버족 소개


(가) 거주지: 중국 동북지방인 요녕성, 길림성 및 서북지방인 신강성 위구르 자치구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나) 인구: 2000년 인구통계로 18만 8천 824명이다.


(다) 말과 글: 중국 동북지방에서 사는 시버족은 한어(=중국어)와 몽골어를 쓴다. 서북지방인 신강성에 사는 시버족은 시버어를 사용하고 시버문자가 있다. 시버어는 알타이 어계의 만주-퉁구스 어족 가운데 만주어에 해당한다.


(라) 민족의 유래: 오늘날의 시버족은 고대의 선비(鮮卑)족에서 유래한다. 선비족은 그 원래 거주지가 선비산(鮮卑山=室韋山) 일대였다는 데에서 유래한 명칭인데 모용부(慕容部) 등 대부분의 선비족들은 황하 유역으로 남하하였다가 뒤에 한족에 흡수되어 버렸으나, 소수의 선비족은 대흥안령(大興安嶺), 눈강(嫩江) 등지에 남아서 수렵, 어로 생활에 종사하였다. 16~17세기 경 만주족이 일어나자 그들의 지배를 받았고 청나라의 국방정책에 따라서 일부 시버족은 서북지방의 신강성 등지로 이주되었고 만주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선비(鮮卑)는 犀毗, 師比, 矢比, 席百, 席比, 錫伯, 室韋 등으로도 쓰는데 동일한 소리(아마도 '스비'나 '스베이')을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이다.

(마) 종교 :샤머니즘 ,조상숭배, 라마교
(바) 문화 :
시버족은 조선족과 만족과 마찬가지로 동북지역 평원에 많이 거주해 왔습니다.
그 뒤로 1764년 청나라 시기 신강의 변강을 지키기 위해 청나라 왕은 시버족 장병 1,000여 명과 그 가족을 함께 약 3천여명 정도를 신강으로 이주시켰습니다. 동북지역의 여러민족들과 같이 생활하다가 신강으로 강제이주되었는데특별한 민족습관이 있습니다.
민족습관으로 보면 일부는 동북에서 그대로 남아내려 온 것입니다. 개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이점은 아마 조선족과 상반되는것같습니다.
신강으로 이주한 뒤로는 신강의 위글족과 하싸크스족과 함께 어우러져 생활하면서 생활습관에 일부 변화가 생겼습니다. 평소에 소고기, 양고기를 즐겨 먹고 또 결혼식날에는 양고기를 많이 올리는 등 특징이 있습니다.
시버족은민족의 언어나 민족 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원래 청나라시기부터 줄곧 만족어, 만족문자를 써왔습니다. 지난1940년대에 만족어와 만족문자를 일부 개편해서 시버족 자체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만족어, 만족문자와 별로 차이가 없는 문자,언어입니다.
시버족 또한 다른 여러 소수민족들과 같이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또 교육열이 매우 높습니다.교육면으로 놓고 볼때 시버족은 교육을 매우 중시하는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부터집안의 여건이 허락된다면 꼭 공부를 하게끔 챙겼습니다. 이런 습관은 지금까지도 계승 발양되고 있습니다. 교육수준을 보면 지금도 전국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시버족은 교육을 매우 중시하는 민족으로적은 인구에 대학생도 아주 많습니다.
시버족의 전통명절은기타 민족과 마찬가지로 음력설, 청명절, 추석을 쇠는 외에도 또 우리 자체의 명절, "서부로의 이전"을 그리기 위해 해마다 음력으로 4월 18일을 명절로 간주하고 보내고 있습니다.
1764년의 4월 18일에 바로 심양의 한 사찰에서 장병들을 신강으로 보내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후부터 음력 4월 18일을 명절로 인식하고 해마다 경축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동북에 남아있는 시버족과 신강에 있는 시버족이 서로간의 정을 나누고 그리움을 전하는 명절입니다.
또한 전통적으로 시버족은 양궁을 매우 즐기고 있습니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아주 잘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2009. 2. 8. 20:30
[세계의 창]어순·발음 흡사…한국어와 친척
[경향신문 2007-03-23 16:14:22]




Fig. 1 The Script of Word " Manchu" ( Free Public Domain )
만주어는 어떤 언어일까. 언어학자들은 아시아 주요 언어 중 만주어와 가장 가까운 말은 한국어라고 본다. 만주어는 중국어와는 언어 구조가 크게 다르다.

만주어는 한국어처럼 알타이어 계통의 언어다.
주어, 목적어, 동사 순으로 말을 한다. 두음법칙과 모음조화가 있다.
만주어는 어휘에서도 한국어와 비슷한 뜻을 가진 말이 수백개에 이른다. 한국어의 ‘마누라’라는 말은 만주어에서도 비슷한 발음으로 불리며, 의미도 똑같이 아내를 뜻한다.

만주족의 나라 청나라가 아시아의 패권국가였을 당시 만주어는 당당히 국제어로 ‘대접’을 받았다. 조선 정부도 만주어 역관을 뽑아 교육시켜야 했다.

만주어의 진정한 ‘이웃 사촌’은 시보(錫伯)어이다. 시보어와 만주어는 어려움 없이 서로 뜻이 통할 정도라고 한다. 선비(鮮卑)족 계통인 시보족은 청나라 시절인 18세기에 만주에서 오늘날의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로 이주당한 소수 민족이다.

오지인 신장에 살았던 관계로 시보족은 자신의 말을 오늘날까지 지키는 것이 가능했다. 지금 3만명 정도가 시보어를 쓰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체 시보족은 20만명에 조금 못 미친다. 언어가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시보족은 그나마 자신들을 고향인 만주 흥안령(興安嶺) 산맥에서 쫓아냈던 만주족보다는 모어(母語)를 조금 더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는 처지다.

〈김용석기자〉-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2009. 2. 8. 20:10

[세계의 창] 멸종위기의 ‘만주어’

[경향신문 2007-03-23 16:14:23]
‘대제국의 목소리는 이제 아주 희미하게 들릴 뿐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만주어가 통용되고 있는 마지막 마을인 중국 동북부의 산자쯔를 다룬 르포 기사를 최근 소개했다.
많은 언어가 생겨나고 사라졌지만, 만주어처럼 급속하게 몰락의 길을 걸은 언어는 흔치 않다. 1644년 명(明)의 수도였던 베이징(北京)을 점령한 만주족은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한 제국, 청(淸)의 이름으로 중원과 만주를 아울러 통치했다. 만주어는 전 중국의 공식 언어였다.


그러나 1911년 청나라가 망하자 만주어는 100년도 지나기 전에 말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100여명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소멸했다. 이제 만주어는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중환자와 같은 처지에 놓였다.

NYT 기자가 산자쯔를 찾았을 때 멍수이징 할머니(82)는 증손자를 재우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가야. 어서 자거라. 네가 잠들어야 엄마는 일하러 가지. 엄마는 불 피우고 음식 만들고 돼지들에게 먹이 주련다”라는 자장가를 만주어로 불렀다.
만주어 자장가를 듣고 자란 이 아기가 커서 만주어를 들려주며 아이를 재울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주민 1054명 중 3분의 2가 만주인으로 중국 내에서 가장 두드러진 만주족 집단 거주지인 이 마을에서도 만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80대를 넘긴 노인 18명뿐이다.
현재 중국에서 자신들을 만주족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1000만명 정도다. 이들은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 성 등 동북부 지역에 주로 산다. 일부는 베이징과 다른 북부 지방 대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만주인들은 1000만명이 되지만, 거의 대부분이 중국어만을 쓰고 있다. 수백만명, 혹은 수십만명에 불과한 다른 소수 민족들이 학교를 세우고 신문을 발행하며 고유언어를 지켜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만주족은 한족에 동화돼 극히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언어를 지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
만주족들이 즐겨 입는 옷, 주택과 생활습관도 이제는 한족이 주도하는 중국식으로 바뀐 상태다. 산자쯔와 같은 외딴 마을에서만 고유의 습관이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개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개털로 만든 모자도 쓰지 않아요.”
산자쯔에서 만주어를 가르치기도 했던 자오진춘은 만주족들은 개를 존중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개를 어떻게 ‘대우’하느냐는, 만주족과 한족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 중의 하나다. 만주족들은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태조·1559~1626)의 생명을 구해준 동물이라며 개에게 각별한 사랑을 쏟는다.
지금 중국에서 만주어 교습이 이뤄지고 있는 곳은 멍 할머니의 손자인 스준광(30)이 연 산자쯔의 조그마한 학교가 유일하다. 7세부터 12세까지의 어린이 76명이 만주어를 배우고 있다. 스준광은 “우리가 우리말을 잃는 것은 정말 큰 아픔이다”라며 5살 난 아들에게 증조할머니와 만주어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고 있다. 만주어를 지키려는 힘겨운 노력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만주어의 소멸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50대인 자오는 “우리 세대에서는 만주어로 의사소통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산자쯔에서조차 대부분 집에서 중국어로 말을 한다”고 말했다. 만주인 가정내에서도 만주어를 쓰지 않게 되면 다음 세대에 만주어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만주족 출신으로 헤이룽장대 교수인 자오아핑은 “만주어는 살아있는 화석과 같은 존재”라며 “만주족 언어와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성과를 거두기는 매우 힘든 실정”이라고 말했다.
〈김용석기자 kimys@kyunghyang.com〉-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기사출처]
2009. 2. 7. 00:42
드디어 2006년 9월 '요하문명공정'으로고조선, 부여, 거란, 금, 청의 중국사편입의 충격적 소식이단편으로보도되었습니다. (조선일보 2006년 9월 8일 보도)

하지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중국의 신국가전략사업인 '요하문명공정'은 백제의 뿌리인 부여사와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과 배달국시대의 홍산문명등의 중국사편입으로 남북한의 국가존립의 정체성마저 송두리째 뿌리뽑아대고 있는데...

(미혹한 분들을 위해서 부언하면 신라사는 이미 동북공정 초반에 중국사로 편입되었지만 이를 간과하는 분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도굴한 부여國 유물 ‘중국 문화재’ 둔갑
中 역사왜곡 현장 ‘요하문명展’ 가보니…
뿌리 같은 백제까지 중국사 편입 속셈
“엉터리” 지적하면 “그건 당신들 생각”
신형준기자 hjshin@chosun.com
입력 : 2006.09.08 23:59 / 수정 : 2006.09.09 02:05
랴오닝(遼寧)성 성도인 선양(瀋陽)시 시정부 광장. 인구 700만 선양시에서 통행량이 가장 많은 곳이다. ‘요하문명전(遼河文明展)’이 열리고 있는 랴오닝성 박물관은 이 광장과 인접해 있다. 6월 8일부터 예비전시가 진행 중인 요하문명전 포스터가 유독 눈에 띈다. 다른 전시 포스터보다 크기가 훨씬 크다. 시대별로 정리된 5개 전시관에는 안내원 2~3명씩이 배치된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그중 ‘화하일통’(華夏一統·‘중국은 하나다’라는 뜻)으로 명명된 제3전시관에는 진한시대 이후 중국 동북지방에서 명멸했던 여러 왕조들의 유물이 전시돼 있었다. 부여, 고구려 등 우리 민족의 뿌리를 이룬 나라들도 별도의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부여가 중국의 소수민족 국가? 중국 선양 랴오닝성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요하문명전’전시관 입구의 포스터.(사진 위)

전시실 내부에선 ‘부여’를 설명하며 “우리나라(중국) 동북 역사상 중요한 소수민족” “나라를 세운 이래 한(漢)왕조에 신하로서 복종했으며 삼가 번국(藩國)의 예를 지켰다”고 써 놓았다.(사진 왼쪽) / 선양=이명진특파원
  • 깔끔하게 정돈된 전시실에 들어서 안내문을 보는 순간,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 “진한 왕조의 중원 통일 이후 요하 유역은 대부분 중원(중국) 왕조의 판도였다. 그 왕조들이 쇠퇴하자 여러 소수민족들이 들고 일어났다. 서부의 선비모용씨, 북방의 부여, 동북의 고구려 등이 경쟁하면서 민족의 대융합을 이뤄냈다. 이들은 화하문명의 활기를 불어넣고 당 왕조를 성대하게 여는 바탕이 됐다.”
    우리 민족 국가인 부여와 고구려가 중국 민족에 융합됐다니? 그리고 부여와 고구려가 화하(중국)문명이라고?
    2평 남짓인 부여 전시실에 붙은 설명은 한술 더 뜬다. “부여는 동북지방에 최초로 왕조를 세운 소수민족으로 건국 이래 한(漢) 왕조에 신하로서 복종하면서 정성으로 예의를 지켰고, 연말에 풍족하게 조공을 바쳤다.” 그 설명문 옆으로 귀고리며 검(劍) 같은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들이 ‘중국 문화재’로 둔갑해 진열돼 있다.

    안내원에게 “이 설명은 누가 붙인 것이냐”고 묻자, “경험 많은 역사학자들이 연구한 사실”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이다.
    부여 전시실 뒤쪽에 마련된 고구려 전시실 역시 “중국 동북의 소수민족으로 중원과 인근 민족 문화를 흡수, 이를 기초로 독특한 문화풍속을 형성했다”고 설명돼 있다. 중국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한 오녀산성(고구려 첫 수도)의 대형 사진도 걸려있다. 이곳을 구경하던 한 단체관람객은 동료들에게 “오녀산성에 가봤는데 정말 좋더라”며 자랑하고 있었다.

    박물관측은 조만간 예비전시를 마치고 본 전시에 들어갈 예정이다.

    최근 요하문명전을 관람한 한 한국 주재원은 “동북공정이 진행되면서 중국의 일반 국민들 사이도 이미 부여나 고구려 문화가 자기네 것이라는 인식이 당연시되고 있다”며 “왜곡된 것이라고 지적하면 ‘그건 당신들 생각’이라는 답이 돌아온다”고 말했다.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494년까지 800년 가까이 존재했던 부여(扶餘)는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가 된 국가였다. 그런데 중국은 현재 이 부여마저도 ‘동북공정’ 안에 포함시켜 중국사로 만들고 있으며, 결국에는 고구려와 백제도 중국사의 일부로 볼 수 있다는 속셈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종수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 박사는 “1940년대 후반 터파기 등을 하다가 금귀고리나 철검 등 초기 철기시대의 위세품이 쏟아지자 마을 주민들이 마구 도굴했다”며 “한때는 500~600여기 이상의 고분이 도굴됐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다. 그러자 중국 당국은 1956년 정식 수습 조사를 벌였다”고 말했다.
    최근 이 전시회를 다녀온 강인욱 부경대 교수(고고학)는 “이 전시회의 모토는 전시회장 입구에 걸린 ‘다원일체 중화민족(多元一體 中華民族)’”이라며 “중국은 문화혁명 이후 1980년대부터 중국 영토 안의 모든 역사는 중국사라는 원칙 아래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