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역사여행 에 해당되는 글 4건
- 2013.09.30 몽골 투르크 비문의 한-몽 공동 탁본사업의 출발 - 흥선스님 1
- 2009.02.08 몽골문자와 만주문자 - 언어학자 성백인교수
- 2009.02.08 기초만한사전, 김득황편저 - 대지문화사(1995) 1
- 2009.01.20 [서안피라미드] 1. 한선제漢宣帝 두릉杜陵의 진짜 무덤주인은 누구인가?
2013. 9. 30. 15:54
'역사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몽골문자와 만주문자 - 언어학자 성백인교수 (0) | 2009.02.08 |
---|---|
기초만한사전, 김득황편저 - 대지문화사(1995) (1) | 2009.02.08 |
[서안피라미드] 1. 한선제漢宣帝 두릉杜陵의 진짜 무덤주인은 누구인가? (0) | 2009.01.20 |
2009. 2. 8. 21:57
몽골 문자와 만주 문자
성 백 인 / (서울대 교수, 언어학)
몽골 문자와 만주 문자는 모두 독창적으로 창제된 문자가 아니라 인접한 민족들이 사용하는 문자를 차용한 문자들이다. 만주 문자는 몽골 문자를 차용한 것이고, 몽골 문자는 위구르 문자를 차용한 것이다. 고대 토이기족의 한 분파인 위구르족이 사용하던 위구르 문자도 역시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소그드 문자를 차용한 것이다. 소그드족은 고대 이란족의 한 분파이다. 그렇게 그 계보를 찾아 올라가면 그 시원은 로마자나 씨릴 문자의 시원과 동일한 고대 문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소그드 문자는 아람 문자로, 아람 문자는 페니키아 문자로, 이는 또 시나이 문자로, 시나이 문자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로 그 계보가 이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몽골 문자
몽골족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개 13세기 초엽 칭기즈 칸 시대에 위구르 문자를 차용하여 몽골 말을 적기 시작하였다. 이 차용 문자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기록은 1225년경에 세운 칭기즈 칸의 조카, 이숭거(Yisüngge)의 기념비이다. 이 위구르 문자에 기원을 둔 몽골 문자는 몽골에 들어와 사용되면서 점차 글자의 모양이 변개되었고, 몽골어를 적는 데 또는 외래어를 적는 데 필요한 새로운 문자가 추가되어 문자의 수도 늘게 되었다.
몽골 문자는 크게 위구르식 몽골 문자와 현대 몽골 문자로 구분한다. 위구르 문자의 자형상의 특징이 대체로 유지되는 16세기 말, 또는 문헌에 따라서는 17세기 초까지의 몽골 문자를 위구르식 몽고자라 하고, 문자의 자형이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표기법도 상당히 변모되는 17세기 초 이후의 문자를 현대 몽골자라 한다. 현대 몽골자란 17∼18세기의 고전기로부터 현대까지의 문자를 통틀어 이르는 것이다.
1648년에는 몽골어 서부 방언인 오이라트 방언을 표기하기 위하여, 자야판디타(Zaya Pandita, 札亞班迪達)라는 사람이 몽골 문자를 개량하여, 오이라트 방언의 음소를 보다 잘 구별하여 적을 수 있는 토도(todo, 托忒또는 陶德)라고 하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다. 이 토도 문자는 몽골자의 세력에 밀리면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외몽골에 속하는 지역에서는 1944년에, 그리고 내몽고에 속하는 지역에서는 1984년에 공식적으로는 그 명맥이 끊어졌다.
元나라 世祖 至元 6년(1269)에는 八思巴라는 학덕이 높은 승려가 세조의 명을 받아, 티베트 문자를 개량하여 파스파(P'ags-pa, 八思巴)문자라고 하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다. 이 새로운 문자는 元의 國書로 만들어진 것인데 元의 세력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언어 즉 몽고어, 한어(漢語), 티베트어, 토이기어 등을 두루 잘 적을 수 있도록 고안된 표음력이 뛰어난 문자였다. 그러나 元나라가 망하자, 위구르식의 몽골 문자의 세력에 밀려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비문이나 고문서로 남아 전하고 있는데, 파스파 문자는 그 뛰어난 표음력으로 하여 당시의 몽골어는 물론 동양의 여러 나라의 옛 언어의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위구르계의 몽골 문자는 오늘날에는 내몽골 자치구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외몽골 즉 몽골인민공화국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1944년에 위구르계의 몽골 문자를 버리고, 씨릴 문자를 차용하여 새 몽골 문자를 만들어 가지고 할하 방언에 기초를 둔 새로운 문어를 제정하였다.
위구르 계통의 몽골 문자는 위구르식 몽골자와 현대 몽골자로 구분되고 있음을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위구르식 몽골자나 현대 몽골자나 그 자형과 표기 체계가 일정하게 통일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여기서 그 변천 과정을 모두 나열 설명할 수는 없다. 현대 몽골자만 해도 인쇄체와 필사체가 다르고, 인쇄체는 또 판본체와 활자체가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필사체는 또 행서체와 초서체로 구별된다. 그러나 변별 기능을 하는 글자의 기본적 특징에 있어서는 서로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서는 고전기 현대 몽골자의 인쇄체를 중심으로 몽골 문자의 기본적 특징을 간단히 설명하기로 한다.
다음 <문자표 1>은 Poppe(1965)의 Introduction to Altaic Linguistics에서 옮긴 것인데, 이는 17∼18세기 고전기 몽골 문어에 보이는 대표적인 현대 몽골자이다. <문자표 2>와 <문자표 3>은 道布 편저(1983),《蒙古語簡志》에서 옮긴 것인데, 2는 청대 몽고 문헌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흔히 쓰이는 현대 몽골자이고, 3은 위구르식 몽골자이다.
몽골 문자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쓰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행을 이어 나간다. 그리고 각 글자는 어두, 어중, 어말의 위치에 따라 자형이 달라지며, 또 자음의 경우 뒤따르는 모음의 종류에 따라 그리고 다른 자음 앞에 놓이는 경우 자형이 달라지는 수가 있다. 그 밖에 어말에서 격 표시 어미와 같은 몇 가지 부가 성분은 위 낱말에 붙여 쓰지 않고 띄어 쓰는 일이 있다. 이를 어말 독립형이라 부른다. 인쇄의 편의상 표1의 순서에 따라 몇 글자의 특징을 설명하기로 한다.
[몽고 문자표 1] (고전기) 현대 몽골자 표
[몽고 문자표 2] 현대 몽골자 표
[문자표 3] 위구르식 몽골자 표
1. a가 다른 글자와 구별되는 기본적 특징은 어두에서는 두 번, 어중과 어말에서는 한 번 중선을 기준으로 좌측 90°각도로 그은 획이다. 그 밖의 다른 특징들은 각 시대의 서법의 특징에 불과하다. 어말형 두 번째(우측) 자형은 b,p,k,g에 이어지는 글자인데, 이때에도 반드시 좌로 a 표시의 획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말 독립형의 경우에는 표1 및 2의 두 번째 글자처럼 좌로 그은 획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2. e는 어두에서만 a와 구별된다. 어중과 어말에서 자형상으로는 a와 구별이 되지 않는데, q,Υ,k,g에 연할 때는 앞 자음에 의해서 a 와 e가 구별된다. e자는 자형상으로는 모든 모음자의 기본이 된다. 즉 어두에서는 모든 모음자는 e자와 같이 좌로 90°각도로 그은 획에서 시작된다. 자형상으로는 a자는 e자에 같은 모양의 한 획을 더하고, i자는 사선을 더하고, o,u자는 좌측으로 동그라미를 더하고 , 자는 o,u자 밑에 사선을 더하는 모양이 된다. 결국 모음자들의 기본적인 획은 종선에서 좌로 긋는 90°각도의 획과, 45°각도의 사획과, 동그라미가 되는 셈이다.
3. i자의 변별적 특징은 좌측 45°각도로 내려그은 획이다. 어두에서는 e자와 같은 자형 밑에 그 변별적 특징이 되는 사획을 긋고, 어말에서는 기본 특징이 되는 사획의 우측을 둥글게 돌려 마무리한다.
4. o,u자의 기본적 변별 특징은 좌로 돌린 동그라미인데, 어말자의 경우, 표에는 없지만, b,p에 연할 경우 오른쪽으로 돌리는 획이 없다.
5. ö, ü자는 o,u자 아래에 어중 i자와 같은 획을 더한다. 그러나 어중에서는 일반적으로 o,u자와 같은 자형을 쓴다.
6. n자는 e자 좌측에 점을 더한 것이 그 특징인데, 어중에서는 모음 앞에서는 점을 더하고, 자음 앞에서는 점을 찍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더러는 자음자 앞의 n에 점을 찍은 경우도 있고, 옛 문헌으로 올라가면 모든 n에 전혀 점을 가하지 않은 문헌도 있다.
8.9. q(χ)와 Υ 의 구별은 Υ 에는 좌측에 두 점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음 앞과 어말의 Υ 에는 점을 가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문헌에 따라서는 어느 위치에도 Υ 에 점을 가하지 않은 경우도 있고, 어떤 문헌에서는 Υ 에는 점이 없고 q에 점을 가한 경우도 보인다.
10.11. 표 1에 보이는 b의 어말형은 17∼18세기 고전기 문어에 흔히 보이는 꼴이고, 현대 몽골자에서는 표 2의 7번에서 보는 바와 같은 어말형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12.13. š는 s의 우변에 두 점을 가한다. 표 1의 12번의 어말형 오른쪽 꼴은 주로 옛 문헌에 보이는 특이한 자형이다.
14. t와 d는 같은 글자로 표기한다. 어중자 둘째 자는 자음 앞에 쓰이는 꼴이다. 현대 몽문에서는 외래어 표기에, 모음 앞 어중자의 꼴을 어두에 써서 d를 표기하여 t와 d를 구별하여 적는 일이 있다.
19. y는 어두에서는 j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 몽골자에서는 표 2의 19에서 보는 바와 같이, 끝을 올린 개량된 문자를 써서 j와 구별한다.
20.21. 20의 k,g자는 음성 모음자 앞에만 쓰인다. 21은 외래어 표기에 쓰이는 글자이다.
이 밖에 현대 몽골자에는 17세기 이래 티베트어 어음, 범어 어음, 한어 어음을 적기 위하여 만든 갈릭자(galik)라고 하는 특수 문자가 있다. 문자 표 2에 문자 수가 늘어난 것은 한어 어음 표기용 갈릭자 몇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앞에 보인 문자표 1을 중심으로 몽골 문자의 기본적 특징을 설명하였다. 그 기본적 변별 특징만을 보면 위구르식 몽골자와 현대 몽골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몽골 문자를 위 표에서 본 바와 같이 글자를 자음·모음으로 나누어 낱소리글자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언제부터 나타나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몽고 사람들의 전통적 이해 방식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 내몽고에서 나온 몽골어학서들 속에서도 표 2와 같은 분석적인 문자표가 보이지만, 몽골 문자를 그와 같이 분석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시도는 서양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몽골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몽골 문자를 十二 字頭를 통해서 배워 왔고, 각 자두에 제시된 음절 단위의 문자를 한 글자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해의 바탕은 문자의 특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몽골 문자는 음소 문자라고 하지만, 음소 단위로 분명히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특성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몽골 문어는, 그 문자들이 음소 문자라고는 하지만 완전한 음소 문자는 아니어서, 몽골 문자만을 알아 가지고서는 읽을 수 없는 글이다. 몽골말을 잘 알아야 읽을 수 있고, 로마자로 전사할 수도 있다. 몽골어의 옛 문어(또는 書面語)는 물론 오늘날 몽골자로 쓰인 문어도 그것을 읽거나 로마자로 옮기자면 여러 몽골어 방언의 현대 어음을 토대로 하여 어음을 구별하는 도리밖에 없다.
옛 몽골 문어를 로마자로 전사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몽골 문어를 전자 방식으로 로마자로 옮기는 일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따라서 옛 문어를 로마자로 전사하기 위해서는 그 표기가 어떠한 어음을 적은 것인가를 알아내야만 한다. 현대 여러 몽골어 방언들을 비교하여 옛 어음을 재구하는 방법을 택하든가, 그 당시 다른 문자로 기록된 옛 몽골어 기록을 토대로 하여 어음을 추정하는 방법을 통해서 로마자로 전사하는 도리밖에 없다. 이와 같이 옛 몽골 문어의 로마자 전사는 몽고어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학자들마다 로마자 방식이 다를 수 있는 일은 이러한 사정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사정 때문에 현대 몽골어를 로마자로 적고자 하는 경우에는 문어의 로마자 전사가 아닌 현대 몽골어의 음운 표기나 음성 표기를 하는 일이 있다. 외몽골에서 몽골자를 버리고 씨릴 문자를 채택하면서 할하 방언을 토대로 완전히 새 정서법을 마련한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몽골에서도 일반 서적에서는 전통적 몽골 문어를 사용하는 한편, 어학서에서는 문어(서면어)의 로마자 전사 외에, 현대어의 음운 표기 방식으로 로마자로 적는 현대 몽골어의 표기 방법이 이용되고 있다.
2. 만주 문자
몽골 문자를 차용하여 만주어를 적기 시작한 것은 1599년의 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실록에 의하면, 뒤에 청나라 태조가 된 누르하치는 가가이 자르구치와 어르더니 박시라는 두 신하에게, 몽골 문자로 만주 말을 적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님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그 방법을 일러주며, 그들을 시켜 만주어의 표기법을 창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몽골 문자를 그대로 받아들여 만주 말을 적은 초기의 만주자를 無圈点 滿州字라 하고, 그것으로 적은 만문을 無圈点字 滿文(또는 舊滿文, 또는 老滿文)이라 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무권점자의 기록은 1610년대 후반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檔案들이다. 초기 당안들 가운데는 1607년의 일을 적은 당안이 연대상으로는 가장 이른 것이지만, 이 당안이 실제로 필사된 연대는 1920년 전후, 또는 천총 연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권점 만주자는, 1632년에 청 태종의 명을 받은 다하이라는 사람에 의하여 만주 말을 적는데 적합한 문자로 개량되었다. 즉 무권점자에 點과 圈을 가하여 a와 e,o,와 u,t와 d, 그리고 k와 g와 h를 구별하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는데, 이 새 문자를 有圈點 滿洲字라 한다. 그리고 이 새 문자로 적은 만문을 有圈點字 滿文 또는 新滿文이라 한다.
새로운 만주자 즉 유권점 만주자가 제정 공포된 것은 정확히는 1632년 3월 7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 당시의 기록인 舊滿洲檔을 보면 3월 7일 전후의 표기가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 그러나 3월 7일을 경계로 하여 舊滿文과 新滿文의 모든 특징이 획연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1632년 3월 7일이 분기점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1632년을 전후로 상당 기간의 과도적인 문자 사용의 시기가 나타난다. 즉 1632년 이전의 당안에도 간혹 어음을 구별하기 위하여 점을 가한 곳이 보이고, 1632년 이후의 당안에도 점의 누락은 물론 문자 이용에 있어서도 무권점자적인 특징이 부분적으로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그 당시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1632년의 문자 개량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축적된 개량의 방안들이 1632년에 정리 공포된 것으로 보인다. 또 그 뒤에도 부분적인 정리가 뒤따른 것으로 보인다.
1640년대에 접어들면 기본적인 문자의 자형이나 그 이용 방법에 있어서는 완전히 정비된 유권점자 만문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권점자 만문의 규범적인 정서법과 규범적인 어형은 御製淸文鑑(1708년 序)을 거쳐 御製增訂淸文鑑(1771년 序)에 이르러서야 확정된다. 따라서 그간의 유권점자 만문에는 적지 않은 표기법상의 유동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정서법의 문제이고, 기본적으로 어떠한 어음을 어떠한 자형의 문자로 적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1640년대에 확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무권점자 만문은 1599년부터 1632년까지 약 30년가량의 기간 동안 사용된 것이지만, 몇 문자의 사용에 있어서는 몇 단계로 단계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여기서는 가장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무권점자의 표와, 정비된 유권점자의 표를 제시하고, 유권점자 표를 중심으로 몇 가지 특징만을 설명하기로 한다. 각 자형의 기본적인 특징은 몽고 문자와 같은 것이므로 생략하고, 인쇄의 편의상 번호순으로 표를 참조하면서 설명하기로 한다.
만주 문자도 몽고 문자와 마찬가지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쓰며 좌에서 우로 행이 이어진다. 그리고 어두, 어중, 어말의 위치에 따라 글자의 모양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만주 사람들도, 몽고의 경우와 같이, 뒤에 보인 바와 같은 분석적인 자모표가 아닌 음절 단위의 문자표인 十二 字頭를 통해서 문자를 익혔으며, 문자의 단위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문자의 개량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문자의 성격이 완전한 음소 단위의 문자가 아니라 음절 문자적인 속성을 일부 지니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1,2. a와 e자는 함께 설명하기로 한다. 먼저 모음자 a, e, i, o, u, ū의 어두자를 보면 모두 머리가 e자와 같은 획으로 시작됨이 주목된다. 즉 좌로 90°각도로 그은 획이 어두 e자의 기본이 되는 특징인데, e자와 같은 획 아래에 다시 좌획을 하나 더하면 어두 a자, 45°좌하로 사선 획을 더하면 어두 i자, 좌로 동그라미를 더하여 그으면 어두 o자, o 우측에 점을 가하면 u자, 그리고 o 밑에 어중 i자와 같은 획을 그으면 자가 된다.
a의 어말 둘째 자 및 e의 어말 셋째 자와 넷째 자는 그 앞 자음의 끝 획이 b, p 및 k, g, h의 어중자 둘째 자의 끝 획 모양처럼 우측에서 빗겨 내려오는 획을 가진 글자에 이어지는 경우에 쓰이는 자형이다. e의 어중과 어말자 가운데서 점이 없는 자형은 그 모음 앞의 子音의 자형에 따라 점을 가하지 않아도 a가 아니라 e라는 것이 구별되는 경우에 쓰는 꼴이다.
[만주 문자표 1] 초기 무권점 만주자
[만주 문자표 2] 유권점 만주자
예를 들면 ta와 te는 a와 e는 모양이 같고 t자가 서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다. 즉 자음의 모양에 따라 ta와 te가 구별되는 것이다. ta와 te의 우변에 점을 가하면 da,de가 된다. 즉 우변의 점은 모음 a와 e, o와 u를 구별하는 데도 쓰이고, 자음 k와 g, t와 d를 구별하는 데도 쓰인다.
3. 어중 둘째 i, 즉 두 번 사획을 그은 글자는 ai, ei, oi, ui와 같은 이중 모음의 경우의 i를 적은 글자인데, 이때 로마자 전사는 aii로 하지 않고 ai로 한다. 자형에 따라서는 두 사선 가운데 첫 번째 것은 아주 짧게 쓰기도 한다. 몽고어의 경우는 ayi와 같이 yi로 전사한다. 어말 i의 우측 글자는 어미 분리하여 쓰는 경우의 글자이다.
4,5. o와 u의 어말자 가운데 각각 둘째와 셋째 자, 즉 우측으로 획을 돌려 긋지 않은 o자와 u자는 b,p 및 음성자 k,g,h자에 연하는 자형이다. 즉 낱말이 bo,bu,po,pu,ku,gu,hu 등으로 끝날 때 쓰는 자형이다. u의 어중과 어말자 가운데, 점이 없는 자형은, 점을 가하지 않는 e자의 경우와 같이, 앞 자음의 자형에 의하여 o 가 아닌 u임이 구별되는 경우의 자형이다. 즉 tu, ku 등과 같은 경우인데, 이때 점을 가하면 du, gu가 된다.
6. 유권점자 ū는 양성 모음 계열에 속하는 모음인데, 원래 이 문자는 몽고어의 경우에는 음성 모음 ö, ü 표기에 쓰이던 것이다. 그리고 초기 무권점 만주자에서도 음성 모음 u표기에 쓰이던 것이다. 초기 무권점자에서는 대체로 몽고어에서 사용하던 대로, 몽고자 o, u자로 만주어의 o를, 그리고 몽고자 , ü자로 만주어의 u를 표기하였다. 그런데 유권점자가 시행되면서 o에 점을 가하여 u를 표기하게 되자, 몽고자 ö, ü자는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이를 유권점자에서 ū로 나타나는 한정된 자리에만 쓰이는 문자로 전용하게 된 것이다. ū가 나타나는 자리는, 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주로 kū, gū, hū의 경우인데, 이때 k, g, h는 양성 모음자와 연결되는, 몽고어에서는 q(χ)로 전사하는 자형이다.
무권점자에서 유권점자로 넘어오면서 가장 혼란을 빚었던 표기는 바로 원순 모음의 표기인데,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ū이고, 그 유동 과정은 만주어 음운론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이 만주어의 는 대체로 몽고어의 u [o] 또는 [ ]와 같은, 만주어의 좁은 [o]를 적은 것으로 보인다.
7. 어중 n자 가운데 좌변에 점이 없는 글자는 minde의 경우와 같이 자음 앞에 오는 n의 표기이다. 어말의 n에는 점을 가하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특정한 漢語 표기인 경우에는 어말 n에도 점을 가하는 일이 있다.
8,9,10. k, g, h의 어두 및 어중자 가운데 각각 첫째 자형은 모음 a, o, ū가 연할 때의 자형이고, 둘째 자형은 모음 e,u,i가 올 때 쓰이는 자형이다. k의 어중 셋째 자와 넷째 자는 각각 어중에서 자음 앞에 올 때 쓰이는 양성자와 음성자이다. 이 경우 양성자의 경우에만 좌측에 두 점을 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11. b의 어말자는 o의 어말자보다 좀 길게 내려그어야 한다.
12. p는 주로 의성어와 차용어에 쓰이는 글자인데, 초기 무권점자에는 보이지 않는다.
13,14. š는 무권점자에서는 S 또는 SI로 표기되어 있다. 몽고자에 s와 š를 구별하는 문자가 있었음에도, 초기 무권점자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쓰지 않고 주로 SI로 표기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15,16,. t와 d는 오른쪽에 점을 가하여 구별한다. t와 d의 어두, 어중의 첫째 자는 모음 a,o,i가 뒤따를 때 쓰는 것이고, 둘째 자는 모음 e와 u가 뒤따를 때 쓰는 글자이다. ti와 di는 차용어(주로 한어)에만 쓰인다. 이러한 양성 자형과 음성 자형의 구별 및 t와 d의 구별은 유권점자 제정 시 고안된 것이다. 어중 우측 글자는 bithe의 t와 같이 자음 앞에 오는 t를 표기하는 자형이다.
19,20. c와 j의 자형은 무권점자와 유권점자가 같으나, 무권점 만문에서는, 유권점자 만문의 어형과 비교해 보면, c와 j의 표기에 혼란을 보이고 있다.
21. y는 어두 j자의 끝을 좀 올린 꼴인데, 무권점자에서는 j와 같은 자형을 쓰고 있다.
23,24. f의 어두 및 어중의 첫째 자형은 모음 a, e가 뒤따를 때 즉 fa, fe의 f 표기에, 그리고 둘째 자는 fo,fu,fi의 f에 쓰인다. 24번의 w는 모음 a,e가 뒤따를 때만, 즉 wa,we 에만 쓰이기 때문에 f와 혼동되지는 않는다. 무권점자에서는 유권점자 표기와 대비해볼 때, f가 b로 표기되는 일이 흔히 있다.
25. ng은 ngga, ngge, nggi, nggo, nggū, ngko 등과 같이 g와 k 앞과 어말에만 쓰인다.
이 밖에 만주 문어에는 한어 표기를 위한 다음과 같은 특수 문자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 특수 문자의 로마자 표기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에 쓴 로마자 표기법은 필자의 표기안이다.
[ 만문 특수 문자 ]
<참 고 문 헌>
- 池上二良, トゥング ス語, 市河三喜·服部四郞編, 世界言語槪說 下卷, 東京, 1955.
服部四郞, 蒙古字入門, 東京, 1946.
道市, 蒙古語簡志, 民族出版社, 北京, 1983
舊滿洲檔, 國立故官博物院 影印, 臺北, 1969.
淸文啓蒙 Cing win ki meng bithe, 永魁齋藏板, 1730
欽定淸漢對音字式, 1772.
N. Poppe, Grammar of Written Mongolian, Otto Harrassowitz, Wiesbaden, 1954.
N. Poppe, Intriduction to Altaic Linguistice, Otto Harrassowitz, Wiesbaden, 1965.- 원문출처 : 국립국어원 누리집 http://www.korean.go.kr/nkview/nklife/1985_3/3_7.html
'역사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몽골 투르크 비문의 한-몽 공동 탁본사업의 출발 - 흥선스님 (1) | 2013.09.30 |
---|---|
기초만한사전, 김득황편저 - 대지문화사(1995) (1) | 2009.02.08 |
[서안피라미드] 1. 한선제漢宣帝 두릉杜陵의 진짜 무덤주인은 누구인가? (0) | 2009.01.20 |
2009. 2. 8. 21:46
만한사전 전자책 - 국립중앙도서관 전자도서관에서 원문통합검색란에 '만한사전' key-in
대지문화사 1995년 발행한 김득황교수의 저술로 발행하게된 경위를 저자가 쓴 책의 머리말을 통해서 소개해 드립니다.
"일찌기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강희시대에 제작한 청문감을 기초로 독,불 어역 만주어 사전이 나왔고 1875년에는 Ivan Zakharoff의 만-러사전이 편술되었다.
일본에서는 해방 전 동양학 연구의 융운을 타고 우전정羽田亭의 만화滿和사전이 나오고 해방후에도 만주구어기초어휘집이 나오고 경도대학에서는 막대한 인력과 재력을 투입하여 1966년에 만,한,몽,장,회 5족어를 대역한 오체청문감의 번역을 완성하였다. 실로 경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최근 미국에서는 와싱톤대학의 Jerrg Norman이 만한사전(A Concise Manchu-English Lexicon)을 편찬하여 만주어 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만주어와 깊은 관계를 가졌던 우리나라는 이 영역에 있어서 아직도 공백상태에 있다. 이제 우리도 무엇인가 하여야 하며 이 빛나지 않는 만주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하겠다.
나는 만주어 학자는 아니지만 만주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고조선사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다가 우연히 만주어와 인연을 맺게된 지 반세기가 넘었다. 처음에는 다른 외국인들이 만든 사전에 못지않은 만한사전을 펴내려는 야심을 가졌으나 나는 어느덧 내일 일을 알 수 었는 대질의 고개에 서있고 이에 더하여 10수년동안 고통을 받고 있는 안근무력증으로 언제 내 안근의 활동이 정지될 지 알 수 없으므로 독자를 만족시킬 만한 사전의 편찬이라는 것을 단념하고 다만 얼마 안되는 어휘라도 풀어놓는 것이 나의 의무로 생각하여 미진하나마 이 작은 사전을 내놓게 되었다.
이 사전에 혹시 해석을 잘못이나 발음의 표기는 물론이고 한글의 표기에도 잘못된 점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이 미진한 부분은 후학들의 보완에 맡기도록 하고 다만 나로서는 이 불완전한 책이 적은 수의 만주어 학도들에게 얼마간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다행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 변변치않은 책을 엮으면서 북경에 다섯차례나 내왕하며 적지않은 어려움도 있었으나 어떻든 4년여만에 빛을 보게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범례 >
1. 이 작은 사전에서는 만주어에서 흔히 쓸 수 있는 보통용어의 어휘를 모아 수록하였다.
희귀한 동식물이나 관아,관직,의례,군기,예술,고어등에 관한 자세한 어휘는 될수록 싣지 않도록 하였다.
2. 여기에 올린 어휘는 오체청문감, 청문총회,만한육부성어,Jerrg Norman의 A Manchu-English Lexion과 우전정의 만화사전등을 참고로 하여 일상어휘를 뽑아서 수록하였으며 뜻의 해석에 의문이 있는 것은 청문감을 따르도록 하였다.
3. 이 책에는 만주어 원문을 수록하도록 하였다. 근래 중국의 학자를 비롯하여 일본,미국등의 학자들이 만주어를 로마자로 표기하여 사용하는 경향이 있으나 로마자로 만주어를 표기하는 것은 회화에는 편리할 지 모르겠으나 글을 보고 읽는데는 결함도 적지 아니하므로 나는 이책에서 만주문자 원문을 올리기로 하였다.
4. 발음표기는 주로 P.G Von Mollendorff의 만주어문법(A Manchu Grammar)를 수용하면서 일부는 나의 견해대로 표기법을 바꿨다
예를 들자면 C를 Ch로, Ts'를 Ts로, Dz를 J로, Zi를 R'u로 바꾼 것등이다.
5. 만주문자의 표기는 한글로 표기하여야만 가장 정확하나 시류를 따라 로마자 발음기호를 쓰도록 하였다.
6. 역문은 어려운 작업이다. 일부 외국인의 사전에는 오역도 있었는데 예를 들자면 입추를 [가을이 서다]라고 번역하였다. 이러한 오역이 있는 듯한것은 원문 청문감과 청문총회를 참고하면서 오역을 피하도록하고 본뜻을 살리도록 하였다.
7.원문의 번역은 될 수 있는대로 한자사용을 피하고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한국말로 의역하였다.
8.만주어에도 낱말하나에 몇가지 뜻이 있는 것이 많이 있으므로 이런 경우에는 몇가지 뜻을 다 올리도록 하였으며 또 한문으로서 한국어화한 낱말도 많이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한문을 한글로 표기하였다
'역사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몽골 투르크 비문의 한-몽 공동 탁본사업의 출발 - 흥선스님 (1) | 2013.09.30 |
---|---|
몽골문자와 만주문자 - 언어학자 성백인교수 (0) | 2009.02.08 |
[서안피라미드] 1. 한선제漢宣帝 두릉杜陵의 진짜 무덤주인은 누구인가? (0) | 2009.01.20 |
2009. 1. 20. 10:19
외국인 조종사가 항공촬영을 하여 '서안 피라미드'로 알려지어 유명해진 아래 사진상의 피라미드군중 첫번째 피라미드를 차이나측에서는 한선제두릉漢宣帝杜陵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서안일대의 피라미드들은 흙으로 세워졌지만 고구려강역이던 집안일대등에 남아있는 장수왕릉,태왕릉등처럼 고구려 석묘계 적석총과 같은 계단식 피라미드형태를 갖고 있어 고구려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계단식 피라미드의 원형으로 추정되어 서안과 함양일대에 산재한 수많은 의문의 무덤군들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견해가 강력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여기서,차이나 측 입장에서 어떻게 변명하는지 그들의 견해를알아보고자 먼저 그들의 사이트에 올려진 소개내용을 중점적으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아래, 차이나 사이트의 한선제두릉소개내역을 그대로 발췌하면서 설명드립니다. '(( ))는 설명부분'
< 한선제두릉漢宣帝杜陵 >
[원창原創 2006-12-29 08:29:24; 발표자發表者: akong5gc ]
두릉杜陵은 한漢 선제宣帝 유순劉詢의 릉묘라 인정되고 있다.
진시황秦始皇의 조모인 하태夏太가 후대에 예언하기를 "백년후에는 만명의 백성이 살만한 읍" 이라 한 지역이다.
杜陵是漢宣帝劉詢的陵墓,是秦始皇祖母夏太後預言“百年後當有萬人邑”的地方。
한선제두릉漢宣帝杜陵초입
((한선제 두릉이라 부르는 위에서 민둥산이 되버린 릉의 옛 모습의 아래 이전사진과위의 사진을 비교해보십시요))
((현재의 민둥산이 되기이전 한선제두릉漢宣帝杜陵 유적지 동문 전경- 계단식 피라미드형태에서 묘목을 심어 초기변형된모습))
[한선제漢宣帝] 이름은 유순劉詢으로 한무제漢武帝의 증손자. 기원전 74년부터 기원전 49년까지 재위하였다.
곽광이 다른 대신들의 견해에 따라 한무제 손자 창읍왕 유하를 황제로 올렸으나 창읍왕이 어리석다하여
대신들과 논의후 창읍왕을 폐하고 증손인 유병기-유순-을 황제로 올렸다.
즉위 후 나라를 잘 다스렸고, 현명한 자들을 임용하였으며, 관리의 치적을 중시하였다.
유순劉詢 “원강元康 원년(기원전 65년) 봄에 두동원杜東原(두원은 옛 지역명으로 기원전 687년 진무공秦武公이 이곳에 두현을 설치한 것에 기인)에 상이 릉을 삼고자 하여 두현杜縣을 고쳐 두릉杜陵이라 하였다.” “제帝가 민간시절에 호鄠와 두杜사이로 여행을 즐기어 이곳에 장사지냈다...”
劉詢於“元康元年(公元前65年)春,以杜東原(杜原是一古國名,公元前687年秦武公於此設置杜縣)上爲初陵,更名杜縣爲杜陵”,因“帝在民間時,好遊鄠杜間,故葬此”……
청나라때 세워진 한선제 두릉비 (淸代所立漢宣帝杜陵碑)
((위의 두 비문 사진에서 보듯이 차이나측에서 가장 오래된 비문자료는 청나라때 세워진 것입니다. 그들이 존중하던 휼룡한 황제의 무덤을 명나라는 관심도 없어 비문조차 세워주지 않았는데 려진족-만주족-의 청나라 황제들이 왜 그들이 멸망시킨 한족의 수천년전 왕의 비문을 세워줬을까요? 상당히 의문이 드는 부분입니다. ))
유순劉詢은 서한西漢때 감옥같은 장안성밖으로 나온 제왕으로 누구보다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깊이 알고있었고 일반백성들을 생각함이 지극하였고 조정에서는 백성을 백성을 사랑하여 정사를 돌봄이 근면하였고 천하를 부유하게 하였고 한漢族족과 흉노족匈奴族의 150년에 걸친 적대상태를 끝마치게 하여 역사에서 칭하기를 “선제중흥宣帝中興”이라 하였다... 최후의 아름답고 좋았던 시절이었고 이후 왕망王莽이 등장하여 제도를 고치고 적미군赤眉軍이 장안을 쳐서 공격하여서 한제왕의 능묘를 마음대로 파내었지만 유독 두릉杜陵은 홀로 피해를 입지 않았으니 늙은 백성들이 그 은혜를 느끼어 답한 것이다.
劉詢是從西漢長安城的監獄裏走出來的帝王,他深知民間疾苦,平民思想較濃,當政時勤政愛民,天下殷富,結束了漢匈奴兩族一百五十年敵對狀態,史稱“宣帝中興”。在他的手裏西漢萬民度過了最後的美好時光,後來王莽改制,赤眉軍打進長安,專挖漢帝王的陵墓,惟獨留下了杜陵,可見老百姓對他的愛戴。杜陵南6.5公裏處有漢宣帝第一個皇後許平君的陵墓,比杜陵小,故稱小陵。古代“小”與“少”通假,俗稱“少陵”,因此後人把之間的原稱爲“少陵原”或“杜陵原”。
두릉杜陵 남쪽 6.5공리에 한선제漢宣帝의 한 후손 허평군許平君의 능묘가 있어 두릉에 견주어 작으므로 칭하기를 소릉小陵이라 하였다. 고대에는 “小”와 “少”는 통하여 잘못된 풍속으로 속칭 ‘소릉少陵’이라 칭하였다. 이후에 사람들이 그 차이를 파악하여 원래대로 칭하여 “소릉원少陵原”을 혹은 ‘杜陵原’이라 하였다.
杜陵南6.5公裏處有漢宣帝第一個皇後許平君的陵墓,比杜陵小,故稱小陵。古代“小”與“少”通假,俗稱“少陵”,因此後人把之間的原稱爲“少陵原”或“杜陵原”
차이나측 근거- 고고연구자료 :
한선제릉 봉토封土 하단부 변의 길이는 175m이고 정상부 변의 길이는 50m이고 봉토의 높이는 29m이다.
능묘陵墓는 릉원陵園의 중앙에 놓여 있으며 사면정중앙에는 각각 지궁地宮을 향해 통하는 묘도墓道가 하나씩 있고 각 묘도의 대소와 형상의 기본적인 내용은 서로 동일하다.
묘도 하단부는 묘도비탈을 따라 경사져있고 항축夯築으로 쌓아서 흙이 고르게 채워져있다.
릉원 둘레에는 장원牆垣-경계를 표시하는 담-을 쌓고 장원牆垣의 정중앙에는 각각 하나의 사마문司馬門을 두었다.
릉총陵塚 동남 575m에는 王의 황후릉皇後陵이 있고 그 봉토및 릉원형상과 제도는 두릉杜陵과 거의 같으며 다만 그 규모를 견주어볼때 작아 건축한 것이 작다.
두릉 종장從葬-쫓아 장사지냄-한 구덩이의 발굴한 면적은 비록 작지만 출토된 수자는 백계의 나체도용陶俑과 차마기車馬器, 병기兵器,금병金餅, 건축재료인 기타 동기銅器, 도기陶器、칠기漆器등이며 서한황제의 풍부한 매장품들의 극한을 나태내보여주고있다.
據專家考古研究:漢宣帝陵封土底部邊長175米,頂部邊長50米,高29米。陵墓居陵園中央,四面正中各有一條墓道通向地宮,四條墓道的大小、形制基本相同。墓道底部爲斜坡墓道,均填土夯築。陵墓周圍築有牆垣,四面牆垣正中各辟一司馬門。陵塚東南575米爲王皇後陵,其封土及陵園形制與杜陵相近,只是規模較小,建築也較簡陋。杜陵從葬坑發掘面積雖小,但出土的數以百計的裸體陶俑和車馬器、兵器、金餅、建築材料以及其他銅器、陶器、漆器等,顯示出西漢帝陵極爲豐富的埋藏內涵。
두릉杜陵은 서한전기에 제릉의 예의제도가 이미 있었고 그것이 승계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며 또 후대 제릉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대답해주어 한 대제릉들중에서 대표성을 갖추고있다.
두릉발굴로 우리는 한 대제왕릉묘의 릉구및 예제禮制와 건축의 단면과...(생략)...을 대답할 수 있다.
杜陵既對西漢前期帝陵禮儀制度有所承襲,又對後代帝陵發生影響,在漢代帝陵中具有代表性。杜陵的發掘使我們對漢代帝王陵墓的陵區以及禮制建築的布局、形制有了清楚的認識,表明了西漢帝陵是當時都城長安的縮影,其陵園形制、布局是仿照皇宮進行建造的,使我們對漢代帝陵有了直觀地了解。
두릉杜陵 인근의 “마마환보림媽媽環保林” 표석
마마환보림媽媽環保林
두릉 오름길의 돌계단(登杜陵的石階)
두릉원조 (杜陵遠眺)
두릉杜陵 - 피라미드
아래 두 사진은 두릉정상에서 본 인근 서안시와 인접한 피라미드 사진입니다.
서안시 원경 (西安市郊遠眺)
차이나측의 사이트에 올라온 한선제두릉소개내용을 훑어 보았습니다.
밋밋한 구릉형태로 현재는 변모되었지만 그 원래 모습은 이 피라미드군의 다른 피라미드에 잘 남아 있습니다.
아래잇달아 있는 또 다른피라미드, 바로 차이나측이 왕후릉이라 주장하는 두번째 피라미드는 그 원형이 보존되어 있어사진에서 보듯이 분명히 서안피라미드가 본디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똑똑히 보여줍니다.
이로서,첫번째 피라미드인 현재의 한선제 두릉의 묘목이 심어져 변형되기 이전의 원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두릉인접 왕후릉 (杜陵不遠處是王皇後陵) - 서안피라미드군중 두 번째 피라미드
이 서안피라미드군의 두번째 피라미드와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적석총 무덤의 대표적인사례들을 서로비교해봅시다.
먼저, 태왕이라는 명문이 출토된 고구려적석총 무덤인태왕릉입니다.
그외태왕릉이나 장군총보다 더 규모가 큰 집안의 천추릉입니다.
현성에서 서쪽으로 3.5km 떨어진 마선하 언덕에 위치하며 방문한 분의 블로그기록에 따르면 장군총보다 7배나 넓다고 합니다.
무덤에 쓰인 자재가 흙이냐 석재이냐의 차이일뿐 기본적인 양식은 여러 단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형상이고 정상이 편평하게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서안피라미드군들은 흙이냐 돌이냐의 소재의 차이만 있일뿐 고구려 적석총들 처럼 모두 피라미드 형태의 계단식 봉분구조를 취하고 있음이 명확해졌고 차이나측이 이를 어떤 방법으로 변형시켜 지나식 무덤으로 형상을 변경시키는지도 아래 사진에서확인하였습니다.
그들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계단식구조의 서안피라미드군들은 홍산문화와 하가점문화의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분묘양식과 동일하며 역시 고구려의 석묘계 적석총 분묘양식과도 연결되어 있음이 명확한 것입니다.
< Reference >
1. 태왕릉 사진과 장군총 사진 두장의출처는 아래 블로그로 고구려탐방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2. 천추릉(천추묘) 사진의출처는 아래 블로그로 해외여행 카테고리 여행사진코너에 있습니다.
'역사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몽골 투르크 비문의 한-몽 공동 탁본사업의 출발 - 흥선스님 (1) | 2013.09.30 |
---|---|
몽골문자와 만주문자 - 언어학자 성백인교수 (0) | 2009.02.08 |
기초만한사전, 김득황편저 - 대지문화사(1995) (1) | 2009.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