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 20. 10:19
외국인 조종사가 항공촬영을 하여 '서안 피라미드'로 알려지어 유명해진 아래 사진상의 피라미드군중 첫번째 피라미드를 차이나측에서는 한선제두릉漢宣帝杜陵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서안일대의 피라미드들은 흙으로 세워졌지만 고구려강역이던 집안일대등에 남아있는 장수왕릉,태왕릉등처럼 고구려 석묘계 적석총과 같은 계단식 피라미드형태를 갖고 있어 고구려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계단식 피라미드의 원형으로 추정되어 서안과 함양일대에 산재한 수많은 의문의 무덤군들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견해가 강력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여기서,차이나 측 입장에서 어떻게 변명하는지 그들의 견해를알아보고자 먼저 그들의 사이트에 올려진 소개내용을 중점적으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아래, 차이나 사이트의 한선제두릉소개내역을 그대로 발췌하면서 설명드립니다. '(( ))는 설명부분'
< 한선제두릉漢宣帝杜陵 >
[원창原創 2006-12-29 08:29:24; 발표자發表者: akong5gc ]
두릉杜陵은 한漢 선제宣帝 유순劉詢의 릉묘라 인정되고 있다.
진시황秦始皇의 조모인 하태夏太가 후대에 예언하기를 "백년후에는 만명의 백성이 살만한 읍" 이라 한 지역이다.
杜陵是漢宣帝劉詢的陵墓,是秦始皇祖母夏太後預言“百年後當有萬人邑”的地方。


한선제두릉漢宣帝杜陵초입


한선제두릉漢宣帝杜陵전경 - 서안 피라미드군중 첫번째 피라미드

((한선제 두릉이라 부르는 위에서 민둥산이 되버린 릉의 옛 모습의 아래 이전사진과위의 사진을 비교해보십시요))


((현재의 민둥산이 되기이전 한선제두릉漢宣帝杜陵 유적지 동문 전경- 계단식 피라미드형태에서 묘목을 심어 초기변형된모습))

[한선제漢宣帝] 이름은 유순劉詢으로 한무제漢武帝의 증손자. 기원전 74년부터 기원전 49년까지 재위하였다.
곽광이 다른 대신들의 견해에 따라 한무제 손자 창읍왕 유하를 황제로 올렸으나 창읍왕이 어리석다하여
대신들과 논의후 창읍왕을 폐하고 증손인 유병기-유순-을 황제로 올렸다.
즉위 후 나라를 잘 다스렸고, 현명한 자들을 임용하였으며, 관리의 치적을 중시하였다.
유순劉詢 “원강元康 원년(기원전 65년) 봄에 두동원杜東原(두원은 옛 지역명으로 기원전 687년 진무공秦武公이 이곳에 두현을 설치한 것에 기인)에 상이 릉을 삼고자 하여 두현杜縣을 고쳐 두릉杜陵이라 하였다.” “제帝가 민간시절에 호鄠와 두杜사이로 여행을 즐기어 이곳에 장사지냈다...”
劉詢於“元康元年(公元前65年)春,以杜東原(杜原是一古國名,公元前687年秦武公於此設置杜縣)上爲初陵,更名杜縣爲杜陵”,因“帝在民間時,好遊鄠杜間,故葬此”……


청나라때 세워진 한선제 두릉비 (淸代所立漢宣帝杜陵碑)

차이나 정부가1988년에 세운 문물보호비(文物保護碑)

((위의 두 비문 사진에서 보듯이 차이나측에서 가장 오래된 비문자료는 청나라때 세워진 것입니다. 그들이 존중하던 휼룡한 황제의 무덤을 명나라는 관심도 없어 비문조차 세워주지 않았는데 려진족-만주족-의 청나라 황제들이 왜 그들이 멸망시킨 한족의 수천년전 왕의 비문을 세워줬을까요? 상당히 의문이 드는 부분입니다. ))
유순劉詢은 서한西漢때 감옥같은 장안성밖으로 나온 제왕으로 누구보다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깊이 알고있었고 일반백성들을 생각함이 지극하였고 조정에서는 백성을 백성을 사랑하여 정사를 돌봄이 근면하였고 천하를 부유하게 하였고 한漢族족과 흉노족匈奴族의 150년에 걸친 적대상태를 끝마치게 하여 역사에서 칭하기를 “선제중흥宣帝中興”이라 하였다... 최후의 아름답고 좋았던 시절이었고 이후 왕망王莽이 등장하여 제도를 고치고 적미군赤眉軍이 장안을 쳐서 공격하여서 한제왕의 능묘를 마음대로 파내었지만 유독 두릉杜陵은 홀로 피해를 입지 않았으니 늙은 백성들이 그 은혜를 느끼어 답한 것이다.
劉詢是從西漢長安城的監獄裏走出來的帝王,他深知民間疾苦,平民思想較濃,當政時勤政愛民,天下殷富,結束了漢匈奴兩族一百五十年敵對狀態,史稱“宣帝中興”。在他的手裏西漢萬民度過了最後的美好時光,後來王莽改制,赤眉軍打進長安,專挖漢帝王的陵墓,惟獨留下了杜陵,可見老百姓對他的愛戴。杜陵南6.5公裏處有漢宣帝第一個皇後許平君的陵墓,比杜陵小,故稱小陵。古代“小”與“少”通假,俗稱“少陵”,因此後人把之間的原稱爲“少陵原”或“杜陵原”。
두릉杜陵 남쪽 6.5공리에 한선제漢宣帝의 한 후손 허평군許平君의 능묘가 있어 두릉에 견주어 작으므로 칭하기를 소릉小陵이라 하였다. 고대에는 “小”와 “少”는 통하여 잘못된 풍속으로 속칭 ‘소릉少陵’이라 칭하였다. 이후에 사람들이 그 차이를 파악하여 원래대로 칭하여 “소릉원少陵原”을 혹은 ‘杜陵原’이라 하였다.
杜陵南6.5公裏處有漢宣帝第一個皇後許平君的陵墓,比杜陵小,故稱小陵。古代“小”與“少”通假,俗稱“少陵”,因此後人把之間的原稱爲“少陵原”或“杜陵原”
차이나측 근거- 고고연구자료 :
한선제릉 봉토封土 하단부 변의 길이는 175m이고 정상부 변의 길이는 50m이고 봉토의 높이는 29m이다.
능묘陵墓는 릉원陵園의 중앙에 놓여 있으며 사면정중앙에는 각각 지궁地宮을 향해 통하는 묘도墓道가 하나씩 있고 각 묘도의 대소와 형상의 기본적인 내용은 서로 동일하다.
묘도 하단부는 묘도비탈을 따라 경사져있고 항축夯築으로 쌓아서 흙이 고르게 채워져있다.
릉원 둘레에는 장원牆垣-경계를 표시하는 담-을 쌓고 장원牆垣의 정중앙에는 각각 하나의 사마문司馬門을 두었다.
릉총陵塚 동남 575m에는 王의 황후릉皇後陵이 있고 그 봉토및 릉원형상과 제도는 두릉杜陵과 거의 같으며 다만 그 규모를 견주어볼때 작아 건축한 것이 작다.
두릉 종장從葬-쫓아 장사지냄-한 구덩이의 발굴한 면적은 비록 작지만 출토된 수자는 백계의 나체도용陶俑과 차마기車馬器, 병기兵器,금병金餅, 건축재료인 기타 동기銅器, 도기陶器、칠기漆器등이며 서한황제의 풍부한 매장품들의 극한을 나태내보여주고있다.
據專家考古研究:漢宣帝陵封土底部邊長175米,頂部邊長50米,高29米。陵墓居陵園中央,四面正中各有一條墓道通向地宮,四條墓道的大小、形制基本相同。墓道底部爲斜坡墓道,均填土夯築。陵墓周圍築有牆垣,四面牆垣正中各辟一司馬門。陵塚東南575米爲王皇後陵,其封土及陵園形制與杜陵相近,只是規模較小,建築也較簡陋。杜陵從葬坑發掘面積雖小,但出土的數以百計的裸體陶俑和車馬器、兵器、金餅、建築材料以及其他銅器、陶器、漆器等,顯示出西漢帝陵極爲豐富的埋藏內涵。
두릉杜陵은 서한전기에 제릉의 예의제도가 이미 있었고 그것이 승계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며 또 후대 제릉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대답해주어 한 대제릉들중에서 대표성을 갖추고있다.
두릉발굴로 우리는 한 대제왕릉묘의 릉구및 예제禮制와 건축의 단면과...(생략)...을 대답할 수 있다.
杜陵既對西漢前期帝陵禮儀制度有所承襲,又對後代帝陵發生影響,在漢代帝陵中具有代表性。杜陵的發掘使我們對漢代帝王陵墓的陵區以及禮制建築的布局、形制有了清楚的認識,表明了西漢帝陵是當時都城長安的縮影,其陵園形制、布局是仿照皇宮進行建造的,使我們對漢代帝陵有了直觀地了解。


두릉杜陵 인근의 “마마환보림媽媽環保林” 표석


마마환보림媽媽環保林


두릉 오름길의 돌계단(登杜陵的石階)


두릉원조 (杜陵遠眺)


두릉杜陵 - 피라미드


비온후의 두릉 (雨後的杜陵)


두릉 주출입묘도 정상근처(人們走出的道路)

아래 두 사진은 두릉정상에서 본 인근 서안시와 인접한 피라미드 사진입니다.


서안시 원경 (西安市郊遠眺)

차이나측의 사이트에 올라온 한선제두릉소개내용을 훑어 보았습니다.
밋밋한 구릉형태로 현재는 변모되었지만 그 원래 모습은 이 피라미드군의 다른 피라미드에 잘 남아 있습니다.
아래잇달아 있는 또 다른피라미드, 바로 차이나측이 왕후릉이라 주장하는 두번째 피라미드는 그 원형이 보존되어 있어사진에서 보듯이 분명히 서안피라미드가 본디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똑똑히 보여줍니다.
이로서,첫번째 피라미드인 현재의 한선제 두릉의 묘목이 심어져 변형되기 이전의 원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두릉인접 왕후릉 (杜陵不遠處是王皇後陵) - 서안피라미드군중 두 번째 피라미드

이 서안피라미드군의 두번째 피라미드와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적석총 무덤의 대표적인사례들을 서로비교해봅시다.
먼저, 태왕이라는 명문이 출토된 고구려적석총 무덤인태왕릉입니다.



다음은 고구려 적석총무덤양식을 대표한다는 가장 유명한 장군총 사진 두장입니다.




그외태왕릉이나 장군총보다 더 규모가 큰 집안의 천추릉입니다.
현성에서 서쪽으로 3.5km 떨어진 마선하 언덕에 위치하며 방문한 분의 블로그기록에 따르면 장군총보다 7배나 넓다고 합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집안의 고구려석묘계 무덤들은 모두 피라미드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무덤에 쓰인 자재가 흙이냐 석재이냐의 차이일뿐 기본적인 양식은 여러 단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형상이고 정상이 편평하게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서안피라미드군들은 흙이냐 돌이냐의 소재의 차이만 있일뿐 고구려 적석총들 처럼 모두 피라미드 형태의 계단식 봉분구조를 취하고 있음이 명확해졌고 차이나측이 이를 어떤 방법으로 변형시켜 지나식 무덤으로 형상을 변경시키는지도 아래 사진에서확인하였습니다.



그들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계단식구조의 서안피라미드군들은 홍산문화와 하가점문화의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분묘양식과 동일하며 역시 고구려의 석묘계 적석총 분묘양식과도 연결되어 있음이 명확한 것입니다.
< Reference >
1. 태왕릉 사진과 장군총 사진 두장의출처는 아래 블로그로 고구려탐방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2. 천추릉(천추묘) 사진의출처는 아래 블로그로 해외여행 카테고리 여행사진코너에 있습니다.